Q의 만남

1. 만남
요 며칠 Q는 불면증을 앓고 있다. 잊고 있던 트라우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지러이 뭉개진 이불을 뒤로한 채 Q는 가까스로 침대 모서리에 앉아 가만히 탁상시계를 응시했다. 새벽 3시 7분…애매한 시간이다. 무얼 하기도,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기도 이상한 그런 시간. Q는 허벅지에 팔꿈치를 괴고 얼굴을 감싼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온통 새카만 방이지만 유독 눈에 익은 자리가 있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실루엣으로 숨은 그림 찾기를 했다. 이건, 화병. 저 탁자 위에 있는 건 작년 이맘때쯤 그린 은행나무……등등.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 없이 짜증이 날 만큼 조용한 공간에 앉아있자니 마치 텅 빈 바보가 된 것 같은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놈의 트라우마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도대체 몇 번인지 셀 수가 없다. 고작해야 9살의 기억일 뿐인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아지질 않는다. 끈적한 껌이 굽에 붙어 바닥에 나뒹구는 이물감들을 끌어당기는 느낌이다. Q는 지금 몹시 기분이 더럽다.
"………."
우웅. 우웅. 핸드폰 진동소리가 울렸다. 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은 딱 한 명이다. 조 팀장. 그는 Q의 첫 전시회를 만든 편집장이자, 보잘것없던 그림들을 단숨에 '작품'으로 만들어준 위인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배곯을 일 없이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됐지만 이상하게도 Q는 조 팀장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예술가의 곁은 온통 미치광이뿐이라고 누가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조 팀장은 그런 Q의 행동을 아니꼽게 보기는커녕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오히려 Q를 당황시켰다. 간혹 둘이 꽤 오랜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춰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사이로 남아있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당연하잖아요, 낯선 사람인데.' 두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하는 조 팀장의 얼굴이 능글맞았지만 그렇다고 과해 보이진 않았다.
오후 2시 미팅 있음. 늦지 않게 오길 바랍니다, Q. 이번 전시회로 당신에게 거는 기대가 꽤 커요.
액정 너머로 조 팀장의 표정이 보였다. 싱글벙글 웃으면서도 차질 없이 계획을 메꿔가는 그를 떠올리자니 무언가 약이 올랐지만 메시지에 쓰인 글자대로 이번 전시회는 꽤 큰 규모로 계획된 이벤트였으므로 최대한 조 팀장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았다. Q는 손깍지를 껴 뒷머리에 놓고는 그대로 누웠다. 긴장은 하지 않는다. 늘 그래왔듯이 기계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인터뷰를 하고, 얼굴도 모르는 VIP의 기분을 맞춰주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심장이 두근거린다. 전시회를 코앞에 둘 때마다 생기는 징크스의 하나일 뿐이지만 유독 신경이 쓰인다. Q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가 알람을 맞춰두었던가, 시간은 많으니 조금 늦장을 부려도 되겠지…….
오후 12시 10분, Q가 눈을 떴다. 미팅까지는 약 2시간이 좀 안되는 시간이지만 꽤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여유를 부려도 된다. 거실로 나와 익숙하게 커피포트를 키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무언가 허전하다. 눈을 뜬지 별로 안된 탓이기도 했지만 늘 느끼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그리는 팔레트에는 여기저기 물감이 묻어있지만 정작 자신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Q가 인기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단순히 하얀 백지를 넘어 무(無)에 가까운 Q의 모습에 열광하는 이가 적잖이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오래가진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책장에 예쁜 책만 꽂아 넣어두고 싶은 것처럼 한동안 감정 없는 Q를 두고 인형놀이를 하는 것 마냥 저 혼자 사랑을 퍼붓던 사람들은 이내 미동도 없는 Q의 모습에 질려 나가떨어지기 십상이었다. Q는 그것이 진실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사랑이라는 건 없다고 치부할 정도로 Q는 유독 사랑에 대해선 오래되고, 딱딱한 나무처럼 굴었다.
삐익─ 잠깐 생각에 잠긴 Q를 깨운 건 아까 눌러두었던 커피포트였다. 소파 위로 다리 한 쪽을 올려두고 누워있던 Q가 몸을 일으켰다. 벌써부터 커피향이 온 가득 떠다녔다. 우웅. 우웅. 아끼는 머그잔에 커피를 막 따를 무렵 어디선가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조 팀장이다. 후우, 짧게 한숨을 쉬고 침대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어 통화를 받았다. 약간 상기된 조 팀장의 목소리가 Q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Q. 일어났어요? 오늘 꽤 좋은 소식이 있어요. 오면 말해줄 텐데 지금 내가 입이 근질거려서."
후룩. Q가 커피를 마셨다. 아. 핸드폰 너머 조 팀장의 짧은 탄식이 흘렀다. 짧은 여유를 방해하지 않겠노라며 첫 마디를 던진 그는 바로 입이 근질거린다던 이슈를 Q에게 과감하게 털어놓았다. 이벤트 전시회니만큼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나, 간혹 VIP의 신상정보를 캐려는 자가 있으니 웬만해선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는 얘기였다. Q가 다시 한 모금 홀짝였다. 조 팀장의 이야기를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확실히 VIP의 은밀한 취미는 구미가 당기는 가십거리다. 하나 크게 잡으면 몇 년을 놀고먹을 수 있는 고료까지 나올 테고, 그 가십거리는 곧 전파를 타고 TV로, 신문 1면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필시 편집부에서도 큰 타격이 온다는 것쯤은 Q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조 팀장이 전화를 한 것도 아마 이 부분을 꼬집으려고 한 것이 틀림없을 테다. 하지만 Q는 너무 지쳤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지쳤다. 너무 덤덤하게 지쳐버렸다. Q는 조금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알게 뭐야.
"봤죠? 많다고 했잖아요, 내가."
오후 1시 48분. 말쑥한 정장을 입은 조 팀장이 한 남자와 계단을 내려오며 Q를 맞이했다. 그리곤 두 어깨를 으쓱거리며 턱 끝으로 Q의 너머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수많은 무리들을 가리켰다. Q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 팀장은 유능한 사람이다. Q가 머릿속으로 수백 번 물고 뜯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1시간 전 무례하게 통화를 끊은 Q에게 문자로 기자들의 간섭을 피할 수 있게끔 건물 내부로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알려주고, 또 이렇게 마주 보고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과 함께 여유 있는 미소로 대하는 조 팀장은 확실히 프로페셔널했다. Q는 괜스레 머쓱해졌다.
"내 정신 좀 봐. 인사하세요. 오늘 인터뷰하실 Q 작가님, 그리고 이 분은……."
"구 형석입니다. 반갑습니다. 유명하신 분을 직접 뵙게 되니 가슴이 떨리네요."
못 보던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도 찰나, 조 팀장의 팔이 Q에게로 뻗었다 자연스레 내려갔다. 오묘한 백합향이 퍼졌다. 조 팀장의 시그니처와 다름없는 향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아우터에 두 손을 쓱쓱 비비고는 악수를 청했다. Q는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듯 그 남자의 손을 잡았다. 탄탄하면서도 태가 예쁜 손이었다. 말끔하고, 부드러운 촉감. 종이와 펜 촉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Q는 꽤 오랫동안 조용히 그의 손을 응시했다. 아차, 순간 정신 차린 Q가 재빨리 손을 빼자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짓던 남자는 손을 자신의 허벅지에 내려놓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기자님 자리 안내해드릴게요. Q 지금 회의실로 들어가면 돼요. 먼저 가 있어요."
조 팀장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묵묵히 서있다 Q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조 팀장의 뒤를 따라갔다. 둘의 움직임을 따라 백합과 종이 냄새가 퐁퐁 솟아오르는 듯했다. Q는 둘의 모습이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왜 그랬을까. 바보처럼 왜 그의 손을 덥썩 잡았을까. 왜 오랫동안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날 뭐라고 생각할까. 수많은 생각들이 Q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쳤다고 밖에 표현이 나오질 않는다. 하지만 그의 손은……뭐랄까, 다시 보고 싶은 손이었다. 한 번 더 만져보고, 손끝으로 그어보고, 손등에 박혀있는 그 펜 촉의 날카로운 향을 맡아보고 싶었다. Q의 시선이 다시금 그들이 걸어간 복도 끝으로 움직였다. 이따가 조 팀장을 만나면 그의 연락처를 달라고 해야겠다.
안녕하세요, 올윤입니다.
생각보다 Q의 과정을 좋아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Q는 생각보다 꽤 복잡한 인물입니다.
예술 쪽으로 일을 하고 있다보니 섬세하고, 날카롭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곤 해요.
Q에 관한 떡밥은 만남 글로 몇가지 던져놓았으니 읽으시면서 찾아보시는 것도 재미있으실거예요:)
사실은 Q의 과정이란 글은 정말 새벽에 갑자기 쓰게 된 글이라
너저분하게 보일 수 있어서 올리고도 조금 후회를 한 글입니다^^;
하지만 작은 용기를 내어 한편 한편씩 이어보도록 할게요.
Q를 왜 이름이 아닌 Q라고 지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조금 적어요.
Q라 적은 이유는 읽는 분들로 하여금 Q로 변신하여 쉽게 감정 이입이 될 수 있도록 한 장치(?)예요.
글재주가 없어 어려우시겠지만, 내가 Q라면…하고 생각해보시고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Q의 과정은 맞춤법 및 문장까지 다시 수정했어요!